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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건 프랑스의 재정위기이다?!?[해설]

by m_ahh 2017.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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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 포스팅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전의 17~18세기에 널리 퍼진 사상적 배경과, 세계사의 흐름을 알아보았다. 앞 포스팅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 혁명 전의 프랑스 재정은 심각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기 이전에도 이미 프랑스의 개혁에 관한 필요성은 대두되었고, 루이 16세는 프랑스 재정 개혁에 관한 의지로 튀르고를 재무총장으로 두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튀르고가 파면되고, 이 후에도 여러 시도를 하게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튀르고 재무총장 이후의 상황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전의 내용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면 된다. 





1786년 

8월, 재무총장이던 칼론이 왕가의 재정파탄을 선언하게 된다. 프랑스의 재정위기가 최악에 가깝던 시절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칼론은 금화주조와 할인은행 발전을 시도하여 타파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다. 또한 왕에게 내부 관세억제와 특권계층에 대한 과세를 건의하였다.(이는 튀르고와 네케르 또한 시도 한 적이 있다.) 또한  이로서 명사회를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1787년 

2월, 명사회가 개최된다. 여기서 칼론은 모든 재산에 구별없이 세금을 부과하기를 요청하였고, 이 조치는 교회 성직자나 귀족 등 특권계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칼론은 프랑스 재정 보고서를 출판하였고, 이는 칼론와 왕실사이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1787년 칼론을 해임하게 된다. (칼론은 퇴임후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한 프랑스 혁명 이후 반혁명운동에 헌신하고 국민의회를 비난하였다. 프랑스로는 나폴레옹의 1802년 귀국허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별 소득없이 끝난 세금신설에 관한 명사회는 삼부회 소집을 


<< 명사회 : Assemblee des notables >> 

국왕의 자문에 의해 중요의제를 논하는 자리로, 발루아 왕조부터 부르봉왕조까지 프랑스 왕조사에 존재하는 자문모임이다. 귀족과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 등이 자문을 했다. 주로 왕족, 귀족, 주교, 판사, 지방 관료 등이 소집되었으며, 소집인물이 되는 것 자체로 영광이었기 때문에 주로 주제에 대한 반대의견보다 부대의견을 덧붙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칼론에 의해 소집된 명사회에서는 세금 신설로 인해 대부분의 귀족이 이를 반대하게 되고, 세금에 관한 안은 국민 각층을 소집한 삼부회를 열어야한다는 의견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것이 프랑스 혁명을 진전시켰지만, 이것이 프랑스의 마지막 명사회가 되었다. 



1788년 

6월 7일 지붕의 기와일로 그르노블에서 국왕의 군대에 민중들이 기와나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8월, 루이 16세에 의해 전국 삼부회가 소집되고 재무총장에 네케르가 취임한다. 


<< 삼부회 : Etats Generaux >>

 삼부회는 프랑스의 세 가지 신분 (귀족,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주요 의제를 토론하는 장으로 중세~근세까지 이어진 신분제 회의이다. 1302년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분쟁시 국민의 지지를 얻을수 있도록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한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1614년 이후 175년이나 열리지 않았지만, 루이 16세에 의해 다시 소집되었다. 






1789년

1월 시에예스의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가 출판되고 인기를 끈다. 그리고 5월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되고, 6월 제3신분에 의한 국민의회 설립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6월 30일 테니스코트의 서약으로 제3신분 의원을 중심으로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게 되고, 삼부회는 제3신분(부르주아)들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폐회되고 만다.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1748-1836)


 프랑스혁명과 통령정부, 프랑스 제1제국의 핵심적 사상기반을 마련한 사람이다. 1789년 출판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는 프랑스 권력을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옮기는 혁명을 선도했다. 이 책의 첫머리는 이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가? 무언가 되기를 원한다. 

 이 책은 앙시엥 레짐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폭로하고, "공공서비스"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귀족정치 아래서 공공서비스란 계급구조 유지를 위한 일인 반면, 시에예스는 이를 제 3계급, 즉 실질적인 노동을 하는 계급으로 나라의 주권을 옮겨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고있고,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급진적 메시지를 제3계급 사이에서 퍼트리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제1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시에예스는 삼부회에서 제3신분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나폴레옹 쿠데타를 선동하기도 하였고,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도 하였다. 


>> 국민의회 Assemblee nationale

 

 프랑스 혁명 첫 해 1789년 제3신분 대표자에 의해 생겨난 의회이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심각한 경제상황 악화로 인해 정치경제적 혼란상태에서 삼부회가 개최되었다. 삼부회에서는 한 신분이 한개의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당시 권력 싸움에서 제3신분은 신분별 표결이 아니라 머릿수에 따른 투표를 요구하며 삼부회가 폐회되었다. 


>> 테니스코트 서약


 제3신분의 부르주아들은 자유주의적 사상에서 1,2 신분들을 설득하여 신분별 표결을 폐지하고자 했으나, 일부만 이를 동의하였고 루이16세는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며 삼부회 회장을 폐쇄하였다. 이에 제3신분 대표는 영국식 국회 건설을 주장하며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였고, 테니스 코트 서약이후 많은 1,2신분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루이16세는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삼부회의 모든 의원이 국민의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



  이 후, 7월, 국민의회가 제헌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꿨고,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제3신분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듯 하였다. 하지만 국왕과 귀족은 이를 저지하게 위해 친위대를 이용하게 되고, 7월 네케르 장관 파면까지 겹치면서 이에 파리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본격적인 혁명이 발발된다. 

 >> 자크 네케르 

 루이 16세 통치 하에서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무총감이 되었다. 그가 제출한 개혁안이 튀르고와 유사하여 귀족에 의해 파면되었으나 1788년 다시 기용되어 삼부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그를 다시 물러나게 하였으나, 그의 후임인 칼론이 재정위기를 구하지 못하자 다시 네케르를 복직시킨다. 1789년의 삼부회에서는 네케르가 제3신분에게 2배의 의석을 허락하였지만 중재에 실패하였고, 법원은 네케르를ㄹ 혁명원인으로 판단하여 해임시킨다. 이 네케르의 해임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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